미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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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
2025. 3. 22. 01:04
작성자
절대로 미여를 거꾸로 부르지마

 

덩치에 비해서 훨씬 작게 느껴지는 등이었다. 근육이 아예 없거나 한 건 아닌데, 사람이 기가 쇠해진 것만으로 이렇게 약해 보일 수 있다니.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새삼스럽게 떠올렸다.

솔데르호를 떠나보내고부터였나? 아니면 새 방법을 고안하고부터? 이 배를 타고부터? 시기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. 어쨌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. 어떻게 된 게 인간이 배보다 다루기 까다로웠다. 재료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이 긴 실험도 끝날 때가 온 것 같았다. 엉뚱하게도 가슴 언저리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. 상냥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조언의 말. 루카스는 속으로 변명했다.

오해야. 나는 아가씨를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야. 그냥 도움 좀 주려는 거지.

루카스는 금속 조각이 들어있을 주머니를 의식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.

 

쉬이…… 머리뼈는 생각보다 잘 으깨져. 잊어라, 잊어.”

 

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좀 짜증 나긴 했어도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. 악에 받친 원망의 말도 심지어 손을 휘둘러도 루카스는 참아왔다. 아니지. 참았다는 건 조금 어색했다. 그저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기만 했다. 아무렴 평온하기만 했을까, 우습기까지 했다. 어쩜, 품 안의 아가씨는 루카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. 여기까지 오기 전에도 내심 알고는 있었다, 알고는. 첫 살인 이후 유의미한 결과가 보이지 않았던 탓에 스트레스도 제법 받았으니까. 아가씨는 시련 이후 급격히 쇠약해지더니 줄곧 현 상태를 유지하기에 급급해 보였다.

시련을 주고 뒷받침해 주기만 하면 알아서 자랄 거라 여겼던 것부터 오산이었다. 진척은 무슨, 시들기만 하는 통에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도 없었다. 제법 질겨 보이길래 잡초인 줄 알았더니, 사실은 허접한 난초였던 아가씨. 기생오라비만치 생기면 뭐 해? 어차피 난초는 오냐오냐 키워줘야 좀 자랄 듯 말 듯 귀찮게 굴고, 결국 노력이 무색하게 금방 죽어버리지 않는가. 그럴 바에는 근본 없는 잡초가 나았다. 적어도 강하니까.

 

아주 힘들면 말이야. 주변에 언제든지 힘들다고 말해도 돼.”

 

아가씨도 결국은 인간. 그처럼 될 수는 없는 거겠지. 그러나 아가씨는 얼마나 긴 인생을 이리도 나약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? 아직 할 수 있는 게 남았다.

 

나도 도와줄 수 있어. 전처럼 강하게 해준다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. 구라 아닌 거 내가 배에다가 바다에다가 맹세해 줄게.”

 

베로니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루카스는 라난 시를 떠올렸다. 한 땅에 존재하던 두 가지 구원. 살지 않도록, 죽어도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들.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. 의미 없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짓이나, 구울 같이 흉한 꼴을 하고서 살아가는 짓이나…… 그딴 것보다 훨씬 좋은 게 있는데. 기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뱉은 말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. 아가씨를 구해주는 건 어렵지 않으니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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